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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기아 타이거즈

-gajago- 2011. 11. 17. 20:48

 

해태-KIA 타이거즈

해태 타이거즈(현 KIA)가 어떤 팀인지를 설명하는 데는 긴 말이 필요치 않다. 프로야구 출범 30년 동안 열 차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서 열 번 모두 우승한 무적의 팀. 1983년부터 1997년 사이에만 아홉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프로야구사에 유일하게 ‘왕조’를 이룩한 팀.

7명의 정규시즌 MVP와 50명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한 스타 군단. 그게 타이거즈라는 팀이다.

지금까지도 타이거즈와 같은 팀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와 같은 팀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하지만 화려함과 영광으로 가득한 역사와 달리, 해태의 시작은 너무도 미약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강당에서 창단식을 갖고 프로야구 세 번째 팀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날 창단식에 참석한 선수단은 총 16명. 제일 먼저 창단한 OB의 창단 멤버가 25명, 최약체로 꼽힌 삼미조차

23명의 선수로 출발한 것을 고려하면 매우 작고 초라한 규모의 선수단이었다. 그나마 시즌 시작을 전후해

조충열, 김경훈, 홍순만, 임정면, 김일권 등이 가세하며 21명으로 수가 늘긴 했지만, 선수가 부족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해태 창단 멤버
   독:
김동엽
  치: 조창수, 유남호
   수: 김용남, 이상윤, 강만식, 방수원, 신태중
  수: 박전섭, 김용만, 김경훈, 홍순만
내야수: 김성한, 김봉연, 차영화, 조충열, 최영조, 차정득, 임정면
외야수: 김준환, 김일권, 김종모, 김종윤, 김우근

 

1982년 1월 30일 열린 해태 타이거즈 구단 창단식. 주장 김봉연이 단기를 들고 있다. 당시 해태 선수단은 선수 자격에 논란이 있는 이상윤, 방수원을 제외하면 14명에 불과했다. 누구도 이 팀이 미래에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 구단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출처: KBO>

 

 

해태가 창단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호남 지역은 광주항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치 경제적으로 소외된

호남권에는 야구단을 운영할 만한 자금력을 갖춘 기업이 드물었다. 그나마 여력이 있는 삼양사, 금호실업,

대한교육보험 등의 기업은 하나같이 야구팀 창단 제안을 고사했다. 결국 간곡한 설득 끝에 해태그룹 박건배

회장이 프로야구 참여를 결정하면서 호남 지역의 주인이 정해졌다.

구단 명칭은 ‘정통성과 민족기상의 표상이 되는’ 호랑이를 뜻하는 ‘타이거즈’로 정했고, 창단 사령탑에는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감독이 선임됐다. 김 감독은 해태 박건배 회장의 고교 선배이자 해태주조 CF 모델로

활동하며 해태그룹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해태 회장이 야구단 창단을 수락하면서 내건 요구조건이 ‘김동엽

감독을 해태에 달라’는 것이었을 정도다. 또 다른 감독 후보였던 ‘호남야구의 대부’ 김양중이 건강상의 이유로

감독 제안을 거절하면서, 김동엽은 해태 감독직에 무혈입성했다. 그리고 이전까지 한 번도 스포츠단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는 해태는 팀 창단부터 선수단 구성까지 많은 부분을 김 감독에게 의존했다.

 

실업 야구 시절의 성공만 생각한 김동엽 감독은 “선수 16명으로도 충분하다”고 자신했지만,

프로야구는 그렇게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해태는 프로 원년 내내 선수 부족으로 고전했다. 창단 당시 해태 엔트리에 투수로 등록된 선수는 딱 5명.

그 중에서도 이상윤과 방수원은 대학 4학년을 앞두고 중퇴한 선수로, ‘대학중퇴자는 선수로 뛸 수 없다’는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정상 선수 자격에 문제가 있는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투수 3명으로 시즌을 시작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창단식을 가진 셈이다. 이에 타자로 입단한 김성한은 시즌 내내 투수와 타자를 오가며 

선발투수로, 지명타자로, 3루수로 나서야 했다. 그 결과 한 선수가 한 시즌에 타점왕과 투수 10승을 동시에

달성하는 초유의 기록이 탄생했다.

 

프로 원년인 1982년 해태 선수단 단체 사진. 왼쪽 아래에 초대 감독인 고 김동엽이 보인다. 해태는 영국 근위병의 복장을 본떠 만든 붉은색 상의-검정 하의 유니폼을 착용했다. 이 ‘검빨’ 유니폼은 상대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982년에는 아니었다. <출처: KBO>

 

 

내야 역시 2루 정도를 제외하곤 확실한 주인이 없는 탓에 김봉연이 1루를 보고, 외야수인 김종모와 김일권이

3루수로 기용되어야 했다. 투수진의 난조와 타선의 부진 속에 14-2로 대패한 3월 28일 롯데와 개막 경기는,

그해 해태의 운명을 보여준 예고편이었다.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4월 30일에는 김동엽 감독이 코치진과의

불화 끝에 한 달 만에 총감독으로 일선에서 물러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남은 시즌은 조창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마무리했다.

38승 42패로 6개 팀 중 전체 4위가 프로 원년 해태의 최종 성적. 하지만 홈런 1, 2위를 차지한 김봉연과 김준환,

타점 1위와 10승을 달성한 김성한, 도루 1위 김일권 등 뛰어난 기량을 과시한 선수들의 존재는 희망적인 부분

이었다. 시즌이 끝난 뒤 해태는 미국에서 야구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국가대표 감독 출신의 김응룡을 신임

사령탑에 임명했다.

 

11월 3일 해태 2대 감독에 취임한 김응룡 감독은 대대적인 팀 개편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조창수와 임신근

2명으로 이뤄진 기존 코치진에 군산상고 감독 출신의 백기성을 영입해 코칭스태프를 강화했다. 또한 허약한

내야 보강을 위해 삼성에서 벤치로 밀려난 서정환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재일교포 투수인 주동식,

포수 김무종의 영입은 팀의 약점인 배터리를 든든하게 했다. 또한 김응룡 감독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앞세운

전임 감독과는 정반대로 팀 훈련 외 시간은 철저하게 선수들의 자율에 맡겼다. 단체훈련도 하루 3시간을 넘기

는 일이 드물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김 감독은 “프로 선수에겐 결점 보완의 처방만이 필요한 게 아닙니까.

훈련은 각자가 하는 거지요”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동아일보 1983.6.25).

 

그 결과 해태는 시즌 전 ‘중위권 전력’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상위권을 질주했다. 6월초까지 삼미와

1위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고, 2.5게임차로 뒤진 가운데 6월 7일부터 열린 광주 3연전 맞대결을

싹쓸이하며 단독 1위로 올라섰다. 마침내 6월 24일에는 삼미가 OB에 패하면서 해태는 경기 결과와 관계없이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지었다. 여기에는 원년과 달리 막강해진 마운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이상윤이

20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에이스로 거듭났고, 기존의 김용남(13승)과 강만식(6승)도 호투하며 힘을 보탰다.

김일권으로 시작해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이 줄줄이 들어서는 타선의 힘도 여전했다.

투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해태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도 후기 우승팀 MBC를 4승 1무로 꺾고 챔피언에

올랐다. 1승 2세이브를 따낸 이상윤과 5경기 8타점을 기록한 한국시리즈 MVP 김봉연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첫 우승의 감격도 잠시, 이듬해인 1984년 해태는 전기리그에서 5위로 추락한데 이어 후기에도 3위에

그치며 시즌 종합 순위 5위로 내려앉았다. 표면적으로는 주축 선수들의 잇단 부상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실상을 뜯어보면 연봉과 처우에 대한 선수단의 불만이 극에 달했던 게 결정적인 악재였다. “해태에선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도 다른 팀 평범한 선수만큼의 연봉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매년 시즌 초만 되면 대부

분의 선수들이 불만이 가득했다.” 해태 출신 한 고교 감독의 회상이다. 특히 1983년 우승에 크게 기여한

메리트 시스템의 폐지와 서울 원정 숙소 교체는 선수들에게는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급기야는 1984년

4월 10일 서울 원정 첫 경기를 마친 뒤 그 유명한 ‘불고기 화형식’ 사건이 터졌다. 해태 박건배 회장이 선수단

격려 차원에서 마련한 고기집 회식 자리에서, 선수들이 고기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타버릴 때까지 놔두면서

집단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결국 해태의 1984년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방수원의 ‘프로 최초 노히트노런

대기록만을 볼거리로 남기고 끝났다. 이듬해인 1985년에도 해태는 에이스 이상윤의 부상 공백으로 투수력에

애를 먹으며 종합 3위에 머물렀다. 잔뜩 기대를 모은 괴물신인 선동열은 입단 절차상의 문제로 인해 전기리그

에는 출전할 수 없었다. 다만 후기리그에서 7승 8세이브를 따내는 활약으로 다음 해를 기대하게 했다.

 

해태 김응룡 감독(오른쪽)과 MBC 김동엽 감독이 1987년 올스타전 행사에서 마주보고 있다. 김동엽 감독은 원년인 1982년 해태 창단 감독을 맡았지만 한 달 만에 총감독으로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출처: KBO>

 

 

왕조의 시작

1986년은 해태 왕조가 막을 연 시즌이다. 이해 해태는 팀 내외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내부적으로는 코칭스태프에 김인식 전 동국대 감독, 재일교포 박정일 코치를 영입했고 OB와의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3루수 한대화를 라인업에 더했다. 외부적으론 포스트시즌 제도의 변화가 해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985년까지는 전후기 1위 팀끼리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방식이었지만, 삼성이 전후기 통합우승을 따내자 86년

부터는 전후기 2위 팀에게도 포스트시즌 진출권이 주어지게 된 것. 해태는 이 시즌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2위를

하고도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며 제도 변경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게다가 1986년은 해태에 우수한 신인 선수들이 대거 합류한 시즌이기도 했다.

광주일고-건국대를 거친 차동철과 ‘까치’ 김정수, 장채근, 이건열, 신동수 등이 이 시즌에 한꺼번에 합류했다.

이전까지 고질적인 선수 부족에 시달리던 해태 입장에선 좋은 선수들의 대거 가세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실제로 차동철은 데뷔 첫해 10승을 따내며 마운드에 큰 힘이 됐고, 김정수는 시즌에선 9승에 그쳤지만 한국

시리즈에서 3승을 혼자 쓸어 담으며 시리즈 MVP에 올랐다. 여기에 2년차에 접어든 선동열이 24승-0.99의

평균 자책을 기록하며 역대 투수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부상에 신음하던 원조 에이스 이상윤도 10승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해태 마운드의 시즌 팀 평균자책은 2.86으로 웬만한 팀 에이스 투수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삼성과 맞붙은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은 향후 두 팀의 운명을 가른 명승부로 펼쳐졌다. 삼성은 천하의

선동열을 상대로 김성래가 7회 홈런을 쳐내며 2-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해태 타선은 삼성 에이스 김시진이

등판한 8회부터 뒤늦게 폭발했다. 8회말 김봉연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한 뒤, 1-3으로 뒤진 9회말엔 김일권의

3루타와 만루에서 나온 김성한의 밀어내기 몸에 맞는 공으로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그리고 11회말,

2사 2루에서 김성한의 끝내기 중전안타가 터지며 4시간 9분에 걸친 혈투가 끝이 났다.

삼성으로서는 에이스인 김시진을 투입하고도 당한 패배라서 아픔이 두 배였다.

“정말 어려운 경기였다. 그날 극적인 역전승을 따내면서 해태 선수들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정신력 싸움에서 해태가 이긴 시리즈였다.” 고 당시 해태 우승 주역인 차동철 건국대 감독의

회상대로 해태 선수들은 시리즈 내내 삼성 선수들을 압도했다. 지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 에이스를 만나도

위축되는 법이 없었고, 투수가 선취점을 내주면 다음 공격에서 곧바로 동점 내지 역전을 만들어 냈다.

3차전이 끝난 뒤 터진 ‘선수단 버스 방화사건’은 버스뿐만 아니라 해태 선수들의 승부욕까지 불을 붙인 사건이

었다. 결국 해태는 4승 1패로 두 번째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삼성은 세 번째 한국시리즈 도전에서도

쓴 잔을 마셔야 했다.

 

1986년의 우승은 시작에 불과했다.

해태는 이듬해인 1987년에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을 만나 4승 무패로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다. 고비 때마다

큰 것 한 방을 터뜨린 김준환이 시리즈 MVP가 됐다. 1988~89년에는 상대가 삼성 대신 빙그레로 바뀌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88년에는 문희수가 눈부신 호투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1989년에는 박철우가

맹타를 휘둘러 각각 시리즈 MVP에 올랐다. 이 기간 해태가 달성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깨어지지 않을 위업이다.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3연패로 물러나며 한 해를 쉬어간 해태는,

1991년 다시 빙그레를 꺾고 우승해 통산 6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뤘다. 그리고 다시 삼성과 만난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신인 이종범의 맹활약으로 또 다시 우승, V7의 신화를 달성했다. 그 시절 해태 팬들에게

한국시리즈 우승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반면 삼성과 빙그레는 해태와 각각 세 차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전부 패하면서 해태 왕조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1985년 프로야구 사상 첫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방수원의 투구 모습. 광주 지역에서 리틀야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방수원은 “등판 당일 끝까지 던지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며 “기록을 의식하지 않고 당장 상대하는 타자를 잡는 데만 집중한 것이 대기록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회고했다. <출처: KBO>

 

 

모두가 두려워한 ‘무적 해태’의 전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선 가장 주된 요인은 막강한 팀 전력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0년대 이후 호남지역의 아마추어 야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광주일고, 광주상고,

군산상고 등 호남권 학교에서는 매년마다 우수 선수가 쏟아져 나왔다. 해태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1차 지명을

통해 즉시 전력감의 유망주를 꾸준히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일단 해태 유니폼을 입은 신인들은 우승

경험이 있는 좋은 선배들을 보고 배우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기량이 향상됐다.

물론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법.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한 김응룡 감독의 지도력이 아니었다면, 저마다 개성이 강한 해태의 스타플레이어들을

하나의 ‘팀’으로 뭉치게 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문희수 동강대 감독은 “해태는 김응룡 감독을 비롯해 코칭

스태프의 변화가 가장 적은 팀에 속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매년 코치진을 갈아치우는 몇몇 팀과 달리,

해태는 코치진에 큰 변화가 없었기에 지도방식에도 연속성과 일관성이 있었다. 또한 코칭스태프의 지도력이

흔들리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게 해태가 연속 우승을 따낸 비결이다.”

 

강력한 위계질서는 코칭스태프뿐만 아니라 선수단에도 있었다. 해태와 빙그레 두 팀을 모두 경험한 유승안

경찰청 감독은 “해태는 선후배간 위계질서가 굉장히 엄한 팀 이었다”며 “심지어 1년차 선후배 간에도 위계가

분명했다”고 회고한다. 이에 대해 신동수 동성고 감독은 “위계질서가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해태에서는

팀에 확실한 구심점이 생기는 효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투수조는 선동열을 중심으로, 타자 쪽에서선 김일권,

김봉연, 김준환 등 고참들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잘 뭉쳤다. 팀에 구심점이 있고 선수들이 하나로 뭉치니까,

큰 경기에서 더욱 강한 힘을 발휘했던 것 같다.” 차동철 건대 감독의 말이다. 이는 해태 특유의 끈끈하고 강인

한팀 분위기로 이어졌다. 유승안 감독은 “해태 선수들은 초반에 밀리더라도 ‘우리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는 자신감이 충만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면 빙그레에 있을 때 보면 초반에 앞서도 선수들이 먼저

불안 해했고, 나중에 가면 그게 현실로 나타났다. 그 차이가 한국시리즈에서 두 팀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 였다고 본다.” 빙그레 에이스 한희민을 상대한 1988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해태가 1회초 먼저 4점을

내주고도 끝내 6-5로 역전승한 데는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프로야구 초창기 해태 타이거즈의 마스코트. 팀의 상징인 ‘호랑이’는 삼성의 ‘사자’, 롯데의 ‘거인’과 함께 30년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출처: KBO>

 

 

또 하나.

다소 역설적이지만 해태가 ‘짠돌이 구단’이었던 것도 한국시리즈에서 선수들이 힘을 발휘한 원동력이었다.

김성한 전 KIA 감독의 말처럼 “연봉에 대한 개념이 ‘처음부터 안 주겠다’는 생각으로 버티는 곳”이던 해태에서

그나마 선수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한국시리즈 우승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김응룡 감독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연봉이 워낙 짜다 보니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통해 보너스를 받으려는 열망이 컸다”고

회고했다. 유승안 감독은 “같은 보너스 천만 원이라도 해태에서 주는 천만 원과 빙그레가 주는 천만 원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며 이렇게 말했다. “좀 과장하면 해태 선수들은 그 천만 원을 1억쯤으로 보는 반면에,

삼성이나 빙그레 선수들은 백만 원 쯤으로 봤다고 보면 된다. 해태 선수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보너스를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이었던 반면에, 다른 팀에선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여겼다

고나 할까.” 이 때문일까. 한국시리즈에서 천하무적이던 해태는 의외로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 같은

‘작은’ 무대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1990년, 1992년 플레이오프에서는 각각 삼성과 롯데에 패하면서

탈락했고 1994년에도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2연패로 패퇴했다. 김은식 작가의 말대로 “해태 타이거즈는

남아도는 전력으로 아무 때나 이기는 팀이 아니라, 꼭 이겨야 하는 순간에 힘을 모아 반드시 이기는 팀이었다.”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에서 발췌)

 

해태의 승리는 광주와 호남 팬들에게는 단순한 야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차별과 억압에 울던 그들에게 해태의 야구는 일종의 정치사회적인 대리전이었고, 권력에 대한 통쾌한 복수와

도 같았다. 앞의 책에서 김은식 작가는 다음과 같이 해태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꼴찌 팀 삼미의 옛 팬이 오늘 해태 타이거즈를 그리워한다.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밟히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일어섰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을 빌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지고 떠밀려지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198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선동열이 펄쩍 뛰어오르며 환호하고 있다.

이 우승을 시작으로 해태는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며

‘왕조’를 수립했다. <출처: KBO>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1989년 한국시리즈 우승 뒤 광주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 참석한 해태 선수단. 그 당시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출처: KBO>

 

 

하지만 아쉽게도 해태 왕조는 거기까지였다.

야구천재 이종범이 1997년을 끝으로 일본프로야구 주니치에 진출하며 해태는 팀 전력에 또 한 차례 큰 손실을 입었다.

대신 장성호가 3할 타율을 기록하며 새로운 중심타자로 등장했지만, 이종범의 공백을 메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1997년부터 시작된 ‘IMF 관리체제’는 해태, 쌍방울 등 재정

이 취약한 구단들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겼다.

모기업인 해태제과의 자금난, 해태그룹의 계열사해체 등의 소식은

시즌 내내 선수단에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결국 해태는 1998년 61승 1무 64패로 5위에 그치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임창용을 트레이드로 삼성에 보낸 1999년에는 마운드가 팀 평균

자책 5.21로 크게 무너지며 60승 3무 69패로 종합 7위까지추락했다.

특히 이 시즌에는 김상진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끝에 사망

하며 많은이를 안타깝게 했다.

1998년에 신설된 외국인선수 제도, 1999년 생긴 자유계약선수(FA)

제도 등의 변화도 자금난을 겪는 해태에게는 전혀 유리할 게 없었다.

 

결국 해태는 2000년 57승 4무 72패(.442)로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친 뒤, 이듬해인 2001년 8월 1일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의 기아자동차에 인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태 타이거즈가 ‘KIA 타이거즈’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의 명장 김응룡 감독은 2000년 시즌을 끝으로

해태를 떠나 삼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를 이어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김성한 감독이 2001년부터 사령탑에 올랐다.


1999년 위암 투병 끝에 세상을 등진 고 김상진.

팬들은 매년 그의 기일이 되면 광주구장 한켠

에 김상진을 기리는 플래카드를 걸고 있다.

2009년 KIA의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많은팬이

김상진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붉혔다.

<출처: KIA 타이거즈>

 

 

KIA와 해태의 기묘한 동거

타이거즈의 이름과 전통을 이어받은 KIA는 창단 초기부터 공격적인 팀 운영에 나섰다. 일본에서 프로야구

생활을 정리한 이종범을 다시 영입한 것은 물론, 매년마다 FA와 트레이드를 통해 거물급 선수를 영입했다.

외국인 선수 영입에도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고, 김진우와 한기주 등 신인 선수에게도 거액을 쏟아 부었다.

짠돌이 구단으로 악명 높던 해태 시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전력보강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결과 KIA는 2000년 6위, 2001년 5위에서 2002년 정규시즌 2위로 단숨에 올라섰다.

또한 2003년과 2004년에도 계속해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구단의 기대와 달리 한국시리즈 우승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김성한 감독마저 선수 구타 논란 끝에 2004년 시즌 중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KIA는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2005년에는 팀 사상 최다 패인 76패를 당하며 창단 첫 최하위의 굴욕을 맛봤고,

2007년에도 또 한 차례 꼴찌로 추락했다. 이에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하위권을 맴도는 세 팀(LG, 롯데, KIA)를

한데 엮어 ‘엘롯기’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과거 해태 왕조를 떠올려 보면 이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한 야구 관계자는 “KIA가 창단 초기 적극적으로 투자할 때 우승했다면 좋았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는 KIA의 초기 투자가 선수 영입에만 국한됐을 뿐, 야구장 환경이나 훈련 시설 등 물적 투자에는 소홀했기

때문에 나온 얘기다. 실제로 KIA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해태 시절의 실내연습장인 호승관, 2군 연습장인

함평야구장 등의 시설에는 별다른 개선이 없었다. 이는 KIA 유니폼에 해태 시절 허리띠를 졸라맨 것과 마찬가

지였다. 제대로 된 훈련 시설이 없는 만큼 2군에서 좋은 선수들이 성장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다 보니 KIA는 거의 매년마다 “선수층이 얇다”는 평가에 시달려야 했다. ‘경산볼파크’ 등으로 대표되는

활발한 물적 투자로 삼성이 2000년대 이후 단골 우승팀이 된 것과 대조된다.

 

또한 해태 시절 문화의 잔재도 2000년대 KIA의 발목을 잡은 요인이 됐다. 2003년 플레이오프가 대표적인 예다.

시리즈 전까지만 해도 KIA가 전력상 SK를 압도한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지만, 결과는 SK의 완승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당시 SK의 한 관계자는 “치밀한 전력분석을 통해 KIA 선수들의 장, 단점에 대해 훤히 꿰고 있던

결과였다”고 귀띔했다. 반면 해태 시절 승리 공식에 익숙한 KIA의 코칭스태프는 전력분석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김성한 감독이 물러난 계기가 된 ‘김지영 사건’도 마찬가지. 해태 시절 문화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일이었지만, 달라진 야구계 문화에서는 과거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New' 타이거즈, 마침내 V10을 달성하다

2007년 사상 두 번째 최하위의 수모를 겪은 KIA는 서정환 감독을 해임하고 조범현 배터리 코치를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했다. 조 감독은 2003년 플레이오프 당시 SK 감독으로 KIA를 무너뜨린 바 있다. 또한 광주일고

출신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돌아온 서재응을 영입하며 전력보강에도 의욕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또 다른

메이저리거 최희섭의 부진으로 KIA는 시즌 내내 장타력 부재에 시달렸고, 마운드 불안도 여전했다.

시즌 최종 순위는 6위. 명가 재건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다만 에이스로 성장한 윤석민의 활약과 군에서 복귀한 유동훈의 호투, 김선빈과 나지완 등 신인급 타자들의

활약상은 약간의 기대를 갖게 했다.

은퇴 기로에 섰던 노장 이종범도 이 해 타율 .284를 기록하며 부활의 기미를 보였다.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맞이한 2009 시즌.

초반만 해도 KIA의 전력은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두 외국인 투수(로페즈, 구톰슨)가 연일 호투를 거듭하고

LG에서 다시 데려온 김상현의 홈런포가 폭발하며 KIA의 질주가 시작됐다.

윤석민과 양현종 등 토종 에이스들의 대활약, 부활한 이종범과 최희섭의 맹타, 안치홍의 활약도 큰 힘이 됐다.

KIA는 후반기 시작과 함께 선두권으로 도약했고, 9월 내내 SK와 쫓고 쫓기는 1위 싸움을 벌인 끝에 시즌

1경기를 남긴 시점(24일)에서야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12년만의 정규시즌 1위. 한국시리즈에서도

KIA는 2년 연속 우승팀인 SK를 4승 3패로 꺾고 통산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한국시리즈를 수 차례 재패한 호랑이의 피가 어디 가지 않더라”는 관계자들의 평대로, KIA 선수들은 한국시

리즈 내내 해태 시절을 연상케 하는 놀라운 집중력과 승부 근성을 보였다. 특히 3승 3패로 맞선 가운데 열린

7차전은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의 명승부였다. KIA는 중반까지 1-5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지만, 경기 후반

타선이 집중력을 보이며 5-5동점을 만든 뒤 9회말 공격에서 나지완이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다.

나지완은 한국시리즈 MVP, 김상현은 정규 시즌 MVP가 됐다.

 

2011년 7월 26일, KIA 선수단은 오랜만에 해태 시절의 ‘검빨’ 유니폼을 입고 삼성전에 나섰다.

결과는 KIA의 2-5 패배. 2000년대 이후로는 삼성과 KIA의 위치가 뒤바뀐 듯했다. 하지만 KIA 선수단은

'검빨' 유니폼을 입고 상대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해태 시절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구단도 최근에는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팀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KIA의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밝다. <출처: KIA 타이거즈>

 

 

12년만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선수단과 팬들의 염원인 인프라 투자로 이어졌다.

우승 직후인 2009년 10월 서영종 KIA 사장은 전용 훈련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우승과는 별개로 이전부터

추진해온 일”이라는 KIA 관계자의 설명이다. 2010년 4월 27일에는 프로야구 최초로 3군 운영을 시작했다.

또한 2010년 12월 7일에는 프로야구 최초 전용구장 건립 투자가 확정, 조만간 광주에도 야구장다운 야구장이

처음으로 들어서게 될 예정이다. KIA는 그 외에도 신인 스카우트, 외국인 스카우트, 자유계약선수 영입 등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침내 인적 투자와 물적 투자가 조화를

이루게 된 KIA의 앞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다.

 

 

 

배지헌
배지헌은 야구 전문 블로그 <야구라>의 필진으로 활동 중이다. [야구생활], [스카우팅 리포트 베이스볼 2011] 등의 필진으로 참여했으며, 현재 네이트 스포츠 Pub에 기고하고 있다.

 

감수 신명철 (前 스포츠 2.0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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