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와 해태의 기묘한 동거
타이거즈의 이름과 전통을 이어받은 KIA는 창단 초기부터 공격적인 팀 운영에 나섰다. 일본에서 프로야구
생활을 정리한 이종범을 다시 영입한 것은 물론, 매년마다 FA와 트레이드를 통해 거물급 선수를 영입했다.
외국인 선수 영입에도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고, 김진우와 한기주 등 신인 선수에게도 거액을 쏟아 부었다.
짠돌이 구단으로 악명 높던 해태 시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전력보강에 집중적으로 투자한 결과 KIA는 2000년 6위, 2001년 5위에서 2002년 정규시즌 2위로 단숨에 올라섰다.
또한 2003년과 2004년에도 계속해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구단의 기대와 달리 한국시리즈 우승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김성한 감독마저 선수 구타 논란 끝에 2004년 시즌 중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KIA는
빠른 속도로 추락했다. 2005년에는 팀 사상 최다 패인 76패를 당하며 창단 첫 최하위의 굴욕을 맛봤고,
2007년에도 또 한 차례 꼴찌로 추락했다. 이에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하위권을 맴도는 세 팀(LG, 롯데, KIA)를
한데 엮어 ‘엘롯기’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과거 해태 왕조를 떠올려 보면 이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한 야구 관계자는 “KIA가 창단 초기 적극적으로 투자할 때 우승했다면 좋았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는 KIA의 초기 투자가 선수 영입에만 국한됐을 뿐, 야구장 환경이나 훈련 시설 등 물적 투자에는 소홀했기
때문에 나온 얘기다. 실제로 KIA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해태 시절의 실내연습장인 호승관, 2군 연습장인
함평야구장 등의 시설에는 별다른 개선이 없었다. 이는 KIA 유니폼에 해태 시절 허리띠를 졸라맨 것과 마찬가
지였다. 제대로 된 훈련 시설이 없는 만큼 2군에서 좋은 선수들이 성장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다 보니 KIA는 거의 매년마다 “선수층이 얇다”는 평가에 시달려야 했다. ‘경산볼파크’ 등으로 대표되는
활발한 물적 투자로 삼성이 2000년대 이후 단골 우승팀이 된 것과 대조된다.
또한 해태 시절 문화의 잔재도 2000년대 KIA의 발목을 잡은 요인이 됐다. 2003년 플레이오프가 대표적인 예다.
시리즈 전까지만 해도 KIA가 전력상 SK를 압도한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지만, 결과는 SK의 완승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당시 SK의 한 관계자는 “치밀한 전력분석을 통해 KIA 선수들의 장, 단점에 대해 훤히 꿰고 있던
결과였다”고 귀띔했다. 반면 해태 시절 승리 공식에 익숙한 KIA의 코칭스태프는 전력분석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김성한 감독이 물러난 계기가 된 ‘김지영 사건’도 마찬가지. 해태 시절 문화에서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일이었지만, 달라진 야구계 문화에서는 과거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New' 타이거즈, 마침내 V10을 달성하다
2007년 사상 두 번째 최하위의 수모를 겪은 KIA는 서정환 감독을 해임하고 조범현 배터리 코치를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했다. 조 감독은 2003년 플레이오프 당시 SK 감독으로 KIA를 무너뜨린 바 있다. 또한 광주일고
출신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돌아온 서재응을 영입하며 전력보강에도 의욕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또 다른
메이저리거 최희섭의 부진으로 KIA는 시즌 내내 장타력 부재에 시달렸고, 마운드 불안도 여전했다.
시즌 최종 순위는 6위. 명가 재건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다만 에이스로 성장한 윤석민의 활약과 군에서 복귀한 유동훈의 호투, 김선빈과 나지완 등 신인급 타자들의
활약상은 약간의 기대를 갖게 했다.
은퇴 기로에 섰던 노장 이종범도 이 해 타율 .284를 기록하며 부활의 기미를 보였다.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맞이한 2009 시즌.
초반만 해도 KIA의 전력은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두 외국인 투수(로페즈, 구톰슨)가 연일 호투를 거듭하고
LG에서 다시 데려온 김상현의 홈런포가 폭발하며 KIA의 질주가 시작됐다.
윤석민과 양현종 등 토종 에이스들의 대활약, 부활한 이종범과 최희섭의 맹타, 안치홍의 활약도 큰 힘이 됐다.
KIA는 후반기 시작과 함께 선두권으로 도약했고, 9월 내내 SK와 쫓고 쫓기는 1위 싸움을 벌인 끝에 시즌
1경기를 남긴 시점(24일)에서야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12년만의 정규시즌 1위. 한국시리즈에서도
KIA는 2년 연속 우승팀인 SK를 4승 3패로 꺾고 통산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한국시리즈를 수 차례 재패한 호랑이의 피가 어디 가지 않더라”는 관계자들의 평대로, KIA 선수들은 한국시
리즈 내내 해태 시절을 연상케 하는 놀라운 집중력과 승부 근성을 보였다. 특히 3승 3패로 맞선 가운데 열린
7차전은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의 명승부였다. KIA는 중반까지 1-5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지만, 경기 후반
타선이 집중력을 보이며 5-5동점을 만든 뒤 9회말 공격에서 나지완이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다.
나지완은 한국시리즈 MVP, 김상현은 정규 시즌 MVP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