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장

밤이면 내리는 비...(편지글)

-gajago- 2009. 8. 27. 17:16

 밤이면 내리는 비...(편지글)                                    

설악산의 가을은 그대로 지구의 끝인 것 같다. 밤마다 개울가에 앉아 있음 지난 여름이 생각난다.
숨박꼭질하듯 가희 네가 내 곁에서 숨던 그 참담했던 여름...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지. 가영이를 만나러 가던 택시 속에서 우연히 너를 보았던 것이...
넌 그때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향해... 그 웃음이 화살처럼 날아와 내 심장에
박혔었다. 왜냐면 봄 이후, 넌 나를 위해선 한번도 그렇게 눈부실만큼 화사하게 웃어본 일이 없거든.

가영이도 보내 버리고 그 날... 밤이 이슥할 때까지 한강 백사장에 조그맣게 누워 있었다.
바람이 부지런히 어둠을 져 나르고, 강 건너 아파트 불빛이 신기루처럼 솟아 올랐지. 그 불빛들은
손만 내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지만 그러나 내 앞엔 깊고 어두운 강, 수렁같은 강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자 모든 것을 난 명확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 소망이 그 아무리 절실하게 타 올라도
가희 넌 강 건너 저녘 불빛처럼, 바람처럼, 그 만큼의 거리, 그 만큼의 속도로 흘러갈 뿐이라는 것을..

아아~ 가희야!
어째서 난 미리미리 깨닫지 못 했을까.
사랑(이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나의 속된 화법을 용서해 주렴)이란 게 적어도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색종이 같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사랑은 방황이며, 절망이며... 회한의 절망만이 사는 어두운 바다란 것을...

그래, 가희는 내게 위험한 동물이었다. 널 묶어두고 싶어 했던 나의 옹졸한 실수...
내 손에 닿으면 그대로 네가 꽃이 되리라 믿었던 무모한 착각...
하지만 내 친구 가희야~ 돌아가면 억지를 부려서라도 밥 잘 먹고 잠 잘자고 그럴테야.
국민학교 우등생처럼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직도 너를 묵은 사진 정리하듯 그렇게 추억의 그늘 속에서 잠재울 수는 없지만 보채거나 묶으려 하지 않을께.

보아라. 설악산은 지금 혼자 불타고 있다.
가을이란 '여름이 타고 남은 재' 라고 누가 그랬다지만
설악산의 가을은 저 혼자 저렇게 자지러지며 피빛으로 타 오른다.

나도 설악산을 닮을래. 당분간 너를 만나지 않을래.
안녕~ 내 친구 가희.
내 친구 가희...                                       ---설악산 한 자리에 엎드려 영우가---

학창 시절에 읽었던 박 범신님의 소설 '밤이면 내리는 비' 중에서 주인공 영우가 사랑하던 가희가
다른 남자(황 사빈, 권투선수...비오는 날 묘지에서 강제로 어떻게...맞지?)를 만나는 걸 알고 쓴 편지...

눈물을 머금코? 스스로 물러나? 알아서 기어?...허 참...
불쌍한 놈... 아니, 한심한 놈... 누구처럼 약해 빠져 가지고...


♠사랑이란                                                             

"진실한 자신의 감정에 따라 선택한 거야.
선택이란 지불할 고통과 극기할 용기가 동시에 필요한 법이다.
우리가 정말 증오해야 할 배반이란 뭘까.
그건 자신을, 자신의 확신을 배반하는 거지.
사랑이란 진실이 문제지 한 시절 친구일 수 있었다는
그런 의리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밤이면 내리는 비...중에서 주인공 영우가 윗글과 같은 상황을 겪고...
그걸 인정하며 가희에게 한 말...--->그 순간 을매나 고통스러웠을까~

그의 마음이 다음 글에 잘 나타난다.

"보아주는 사람없이 혼자 춤 추는 어릿광대는
춤 그 자체가 괴로움일 테니까..."

820715일에 다시 읽고(고2 때 이미 읽었었음) 적어논 글..
(당시에 나의 상황이 그랬다. 고2 때부터 사귀던 아가씨와..
후~ 그 야긴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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