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소나기 1

-gajago- 2010. 6. 9. 23:40
이 가을에, 언젠가 매거진에 꼭 올리고 싶었던 황순원 님의 「소나기」를 중학 교과서에서 뽑아 몇 편으로
나누어 올린다. 
한 소녀를 바라보는 소년의 순수한 마음.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음직한 아름다운 이야기.
우리 교과서에 바이런이니 프로스트니 하는 서양 현인들의 글들이 장식했듯이,
90년대 중반 쯤인가 이 '소나기'가 영국의 중학(?)교과서에 실렸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학창시절, 작품속의 주인공만 했을 때 교과서에서 읽을 때의 설레임이 나이 사십을 넘긴 지금에도 똑같거나,
아님 그 시절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것은 바로 내 얘기 같기도 한 너무나 보편적인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촌스럽다 싶을 정도로 순진무구(쑥맥)한 소년의 심리상태가 나 역시 그랬을 법하다.

학창시절의 교과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글... '소나기'
지금 다시 읽어봐도 가슴 설렌다.
여러님께서도 과거 학창시절로 여행해보시면 좋을 듯...

 
소나기  황순원(黃順元)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라는 걸 알았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팔과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갑자기 물을 움켜낸다. 마치 고기 새끼라도 잡으려는는 듯이.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 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단발 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갈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뿐.
 이제 저쯤 갈밭머리로 소녀가 나타나리라.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그런데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발돋움을 했다. 그러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저 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옴큼 움직였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이 갈꽃이 아주 뵈지 않게 되기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내려다보았다.
물기가 걷혀 있었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 날부터 좀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 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잡게 되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한 어떤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싫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 속의 얼굴을 움키었다. 몇 번이고 움키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숨어서 내가 하는 일을 엿보고 있었구나.'
 
 소년은 달리기 시작했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 속에 빠졌다. 더 달렸다.
 몸을 가릴 데가 있어 줬으면 좋겠다. 이 쪽 길에는 갈밭도 없다. 메밀밭이다.
전에 없이 메밀꽃 냄새가 짜릿하게 코를 찌른다고 생각됐다. 미간이 아찔했다.
찝찔한 액체가 입술에 흘러들었다. 코피였다.
소년은 한 손으로 코피를 훔쳐내면서 그냥 달렸다.
어디선가 '바보, 바보' 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
.
.
 
021009..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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