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었다.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체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소녀 앞에서 한 번 실수를 했을 뿐 여태 큰길 가듯이 건너던 징검다리를 오늘은 조심스럽게 건넌다.
"얘."
못 들은 체했다. 둑 위로 올라섰다.
"얘, 이게 무슨 조개지?"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녀의 맑고 검은 눈과 마주쳤다. 얼른 소녀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구었다.
"비단조개."
"이름도 참 곱다."
갈림길에 왔다.
여기서 소녀는 아래쪽으로 한 삼 마장쯤, 소년은 위쪽으로 한 십리 가까운 길을 가야 한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며,
"너, 저 산 너머에 가 본 일 있니?"
벌 끝을 가리켰다.
"없다."
"우리, 가보지 않으련? 시골 오니까 혼자서 심심해 못 견디겠다."
"저래뵈도 멀다."
"멀면 얼마나 멀기에? 서울 있을 땐 아주 먼 데까지 소풍 갔었다."
소녀의 눈이 금세 '바보, 바보' 할 것만 같았다.
논 사잇길로 들어섰다. 올벼 가을걷이하는 곁을 지났다.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소년이 새끼줄을 흔들었다. 참새가 몇 마리 날아간다.
'참,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텃논의 참새를 봐야 할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 재밌다!"
소녀가 허수아비 줄을 잡더니 흔들어 댄다. 허수아비가 자꾸 우쭐거리며 춤을 춘다.
소녀의 왼쪽 볼에 살포시 보조개를 지었다.
저만큼 허수아비가 또 서 있다. 소녀가 그리로 달려간다. 그 뒤를 소년도 달렸다.
오늘 같은 날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소녀의 곁을 스쳐 그냥 달린다. 메뚜기가 따끔따끔 얼굴에 와 부딪친다.
쪽빛으로 한껏 갠 가을 하늘이 소년의 눈앞에서 맴을 돈다. 어지럽다.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가 맴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다보니, 소녀는 지금 자기가 지나쳐 온 허수아비를 흔들고 있다. 좀 전 허수아비보다 더 우쭐거린다.
논이 끝난 곳에 도랑이 하나 있었다.
소녀가 먼저 뛰어 건넜다.
거기서부터 산 밑까지는 밭이었다.
수숫단을 세워 놓은 밭머리를 지났다.
"저게 뭐니?"
"원두막."
"여기 참외, 맛있니?"
"그럼, 참외 맛도 좋지만 수박 맛은 더 좋다."
"하나 먹어 봤으면."
소년이 참외 그루에 심은 무우밭으로 들어가, 무우 두 개를 뽑아 왔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개 건넨다. 그리고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듯이,
먼저 대강이를 한 입 베물어 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림 껍질을 벗겨 우쩍 깨문다.
소녀도 따라 했다. 그러나, 세 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
하며 집어 던지고 만다.
"참, 맛없어 못 먹겠다."
소년이 더 멀리 팽개쳐 버렸다.
산이 가까워졌다.
단풍잎이 눈에 다가왔다.
"야!"
소녀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은 소년이 뒤따라 달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곧 소녀보다 더 많은 꽃을 꺾었다.
"이게 들국화, 이게 싸리꽃, 이게 도라지꽃,‥‥‥"
"도라지꽃이 이렇게 예쁜 줄은 몰랐네. 난 보랏빛이 좋아! 그런데, 이 양산 같이 생긴 노란 꽃이 뭐지?"
"마타리꽃."
소녀는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해 보인다. 약간 상기된 얼굴에 살포시 보조개를 지으며.
다시 소년은 꽃 한 움큼을 꺾어 왔다.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소녀에게 건넨다.
그러나 소녀는
"하나도 버리지 마라."
하고, 산마루로 올라갔다.
맞은편 골짜기에 옹기종기 초가집이 몇 채 모여 있었다.
누가 말할 것도 아닌데,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유달리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따가운 가을 햇살만이 말라가는 풀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꽃이지?"
적쟎이 비탈진 곳에 칡덩굴이 엉키어 꽃을 달고 있었다.
"꼭 등꽃 같다. 서울 우리 학교에 큰 등나무가 있었단다. 저 꽃 을 보니까 등나무 밑에서 놀던 동무들 생각이 난다."
소녀가 조용히 일어나 비탈진 곳으로 간다. 뒷걸음을 쳐 기어 내려간다.
꽃송이가 많이 달린 줄기를 잡고 끊기 시작한다.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만다. 칡덩굴을 그러쥐었다.
소년이 놀라 달려갔다.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이끌어 올리며, 소년은 제가 꺾어다 줄 것을 잘못했다고 뉘우친다.
(소녀의 오른쪽 무릎에 핏방울이 내맺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생채기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빨기 시작했다.←교과서에는 없음. 가자고...)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저 쪽으로 달려간다.
조금 뒤에 숨이 차 돌아온 소년은
"이걸 바르면 낫는다."
송진을 생채기에다 문질러 바르고는 내쳐 칡덩굴 있는 데로 내려가, 꽃 많이 달린 몇 줄기를 이로 끊어 가지고 올라온다. 그리고는,
"저기 송아지가 있다. 그리 가 보자."
누렁송아지였다. 아직 코뚜레도 꿰지 않았다.
소년이 고삐를 바투 잡아 쥐고 등을 긁어 주는 체 훌쩍 올라탔다. 송아지가 껑충거리며 돌아간다.
소녀의 흰 얼굴이, 분홍 스웨터가, 남색 스커어트가, 안고 있는 꽃과 함께 범벅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큰 꽃 묶음 같다. 어지럽다. 그러나, 내리지 않으리라. 자랑스러웠다.
이것만은 소녀가 흉내 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너희, 예서 뭣들 하느냐?"
농부 하나가 억새풀 사이로 올라왔다. 송아지 등에서 뛰어내렸다.
어린 송아지를 타서 허리가 상하면 어쩌느냐고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다.
그런데, 나룻이 긴 농부는 소녀 편을 한 번 훑어 보고는 그저 송아지 고삐를 풀어 내면서,
"어서들 집으로 가거라. 소나기가 올라."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마루를 넘는데, 떡갈나무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그러나, 원두막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그런 대로 비가 덜 새는 곳을 가려 소녀를 들어서게 했다.
소녀의 입술이 파아랗게 질렸다. 어깨가 자꾸 떨렸다.
무명 겹저고리를 벗어 소녀의 어깨를 싸 주었다.
소녀는 비에 젖은 눈을 들어 한 번 쳐다보았을 뿐, 소년이 하는 대로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는, 안고 온 꽃묶음 속에서 가지가 꺾이고 꽃이 일그러진 송이를 골라 발 밑에 버린다.
소녀가 들어선 곳도 비가 새기 시작했다. 더 거기서 비를 그을 수 없었다.
밖을 내다보던 소년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수수밭 쪽으로 달려간다. 세워 놓은 수숫단 속을 비집어 보더니,
옆의 수숫단을 날라다 덧세운다. 다시 속을 비집어 본다. 그리고는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한다.
수숫단 속은 비는 안 새었다. 그저 어둡고 좁은 게 안됐다. 앞에 나앉은 소년은 그냥 비를 맞아야만 했다.
그런 소년의 어깨에서 김이 올랐다.
소녀가 속삭이듯이, 이리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소녀가 다시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소녀가 안고 있는 꽃묶음이 망그러졌다.
그러나, 소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소년의 몸 내음새가 확 코에 끼얹혀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도리어 소년의 몸기운으로 해서 떨리던 몸이 적이 누그러지는 느낌이었다.←교과서에는 없음. 가자고...)
소란하던 수숫잎 소리가 뚝 그쳤다. 밖이 멀개졌다.
수숫단 속에서 벗어져 나왔다. 멀지 않은 앞쪽에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뛰어 건널 수가 없었다.
소년이 등을 들이댔다. 소녀가 순순히 업히었다. 걷어올린 소년의 잠방이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녀는 '어머나'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목을 끌어안았다.
개울가에 다다르기 전에, 가을 하늘이 언제 그랬는 성싶게 구름 한 점 없이 쪽빛으로 개어 있었다.
021009..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