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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걸으면 사흘 … 우이령길 곳곳엔 분단의 흔적

-gajago- 2012. 2. 16. 20:26

천천히 걸으면 사흘 … 우이령길 곳곳엔 분단의 흔적

시인 허혜정이 걸어 본 북한산 둘레길 44㎞

| 제184호 | 20100919 입력

 

<1>우이동 쪽에서 올라가는 우이령길 구간. 산길이지만 군 작전도로라 비교적 넓다.

<2> 흰구름길 내 북한산 생태숲 공원. 모자를 쓴 이는 동행한 숲 해설가 정상만씨다.

<3> 내시묘역길 구간 마을 길. 기와집과 돌담장이 마치 시골길을 연상케 한다.

<4> 마실길 구간 진관외동 계곡. 비온 뒤라 물이 불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5> 순례길 구간의 섶다리. 나무로 세우고 솔가지를 끼워 정취를 더해준다. 사진=신동연 기자

무성한 강아지풀과 야생화가 어우러진 길을 걷는다. 자연의 무수한 주인들을 존중하며 만들어낸

사람들의 마음이 엿보인다. 둘레길은 억지로 산자락을 헐어낸 길이 아니다. 이미 만들어진 샛길과

등산길을 잇고 확장해 자연을 무분별한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조금 더 편리하고 안전하게 길을 정비하고, 목책과 벤치, 평상과 전망대 같은 편의시설을 만들었다.
산책자에게는 불편하겠지만 화장실을 자주 설치해놓지 않은 것은 숲을 지키고자 함이다.
가급적 산책길을 들어서기 전에
용변을 미리 보는 것이 좋다.

순례길은 애국지사 묘역 산책로
어느덧 수유리 동네길로 빠져나왔다. 통일교육원을 지나 한천로 202길 표지판을 지나오니 순례길

구간 아치가 보였다. 4·19 국립묘지가 있고, 군데군데 순국선열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어 순례길이다. 애국지사들의 절개를 상징하듯 늘어선 소나무가 푸르고 울창하다. 냉골에서 조금 올라간 데 위치한 조병옥 박사묘, 김병로 선생묘, 순국선열 유림 선생묘, 신숙선 선생묘, 심산 김창숙 선생묘, 봉암 서상일 선생 묘, 현곡 양일동 선생묘, 강재 신숙 선생묘, 이준 열사 묘 등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순례길은 역사와 미래를, 조상과 후손을 이어주는 길이다.

 

구름정원길(하늘길) 구간의 이정표. 길이 헷갈린다면 이정표와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자. 신동연 기자

간간이 비가 내리는 평일인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 가평에서 왔다는 한 등산객은 둘레길 개통 소식을 신문기사를 보고 알았다며 산책로에 감탄하느라 여념이 없다. 마치 소풍 온 아이들처럼 단체 우장을 한 사람들도 만난다. 따뜻하고 푸른 자연숲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둘레길에는 북적이는 차량도 여관도
‘가든’이라는 이름 붙인 식당도 없다.
문득 인간이 무한히 갈망하면서도 참혹하게 파괴하고 있는 숲들을 생각한다. 죽어가는 것은 자연이지만 정말로 죽어가는 건 우리의 사유와 행동이 아닐까. 인간의 삶도 자연 전체의 리듬과 조화를 이룰 수는 없을까.
둘레길 숲은 진정한 자신을 비쳐보라고 몸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한 권의 서정시집과도 같다. 순례길에는 “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가 놓인 시집 비치대도 있다. 안내소 입구에서 시집을 빌려 읽고 어디든 나서는 길목에서 반납하면 된다. 시인묵객이 아니어도 북한산 자락에서 시에 흠뻑 잠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사람이 읊조린 어떤 시도 북한산 풍경만큼 명작은 아니리라.


음식점들 사이로 난 아스팔트길을 한참 오르면 우리말 소귀고개로 알려진 우이령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고개를 경계로 남서쪽은 북한산, 북동쪽은 도봉산이다. 탐방산행센터에서 예약자 확인을 하고 우이령길에 들어섰다. 보드라운 흙길의 오르막이 이어진다
(사전 예약 필수! http://ecotour.knps.or.kr/reservation/Uir.aspx).

우이령길은 서울의 우이동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코스지만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길이기도 하다. 한국전 때는 좁은 피난길이었으나 미국공병대가 작전도로를 개설한 뒤 지금처럼 길이 넓어졌다고 한다. 1964~65년에 개설된 공병도로에는 남북냉전의 산물인 대전차
장애물이 콘크리트 구조물로 아직 버티고 있다. 한국전 당시 미국 공병대가 설치한 작전도로 개통
기념비도 서 있다. 이 길은 68년 1·21사태(김신조 사건) 이후 69년부터 전투부대가 주둔하면서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지금은 탐방예약제 시행과 함께 일반인에게도 개방됐다. 아직도 군 훈련장과 유격장이 많아 곳곳이 출입금지 지역이다. 해발 330m 오르막 끝에서 시작되는 내리막길을 터덜터덜 오래도록 내려오니 북한산로 878번 길 표지판이 보인다. 드디어 양주시 고현리 우이령길 입구까지 온 것이다. 길이 6.8㎞, 북한산 둘레길 구간 중 제일 긴 구간이다.
 다리가 무척이나 아팠지만 아는 사람에게 건네주고 싶은 9월의 선물 같다.



둘째 날, 효자길~솔샘길

둘레길 둘째 날. 게으른 다리가 갑작스러운 강행군에 놀랐는지 비 때문에 하루를 쉬었는데도 종아리가 뻑뻑하다. 그렇다고 물파스를 비벼야 할 정도는 아니다. 집 나서기 전에 노트북을 켜니 시스템 가동과 동시에 자동으로 메신저가 뜬다. 일요일 새벽인데도 메신저에 접속하고 있는 동료가 있다. “꼭두새벽부터 뭐해?” 동료가 묻는다. 그제 장장 16.5㎞를 걸었고, 오늘도 둘레길로 출발할 거라고 하니 돌아오는 반응이 의외였다.
“어딘데? 안 힘들어? 몇 시간 걸려?” 그제 걸었던 코스 정도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가족과 함께 걷기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으리라. 황급히 둘레길을 설명해줄 블로그 주소를 카피해주고 집을 나섰다.

11일 아침 9시. 충의길 구간을 건너뛰어 효자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사실 충의길은 둘레길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북한산 자락 지주들이 땅을 양보하지 않은 탓에 왕복 4차선 도로 옆 인도가 둘레길이 돼버렸다.

효자길(개통 때는 ‘효자마을길’이었다) 구간에서 처음 찾아본 것은 고종 30년 효자 박태성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효자비다. 박태성은 부모의 삼년상을 그대로 효의 정신으로 실천하여 칭송받는 인물이다. 호랑이까지 감복해 박태성을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안내판에 기록돼 있다. 충효의 심성은 토양을 닮았나 보다. 효자리에는 이런 곳이 있을까 싶게 순한 마을길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민가들이 화려하진 않지만 품격 있는 풍광을 펼쳐놓고 있다. 이어지는 진관동에는 내시묘들이 많다. 사유지인 관계로 직접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조 500 년을 왕조와 함께 해 온 그들의 운명은 묘한 비극적 여운을 간직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비분 강개해 교하에 은거하던 내시(內侍) 반하경(潘夏慶)이 자결을 할 정도로
전생을 왕조에 헌신해온 그들의 충절은 깊었다.

은행나무 숲이 아름다운 진관내동 마을길에 접어들었다.
붉은 맨드라미와 파란 대추알을 매단 대추나무들이 대비를 이룬다. 노란 꽃을 매단 결명자와 우산을 닮은
토란잎이 물방울을 머금고 흔들린다. 물안개가 낮게 깔린 풀길에서 이따금 호랑나비들이 알록달록한 날개를 나풀거리며 사라진다. 진관동 둘레길은 삶의 체취가 감도는 곳이다. 한국의 여느 마을처럼 너무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민가들이다. 마을을 지키는 지신처럼 수령 150년의 느티나무가 아름드리 가지를 뻗고 있다.
 높이 15m, 둘레가 3.6m나 되는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굵은 가지가 끌어안은 하늘 아래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주택들은 외지인이 탐내고 싶을 만큼 예쁜 자태를 자랑한다.

구름정원길(하늘길) 구간 초입, 선림사 근처에서 식당을 찾으니 좀 부담스러운 오리요릿집밖에 없었다.
구기터널 상단의 계곡을 가로질러 평창동까지 가려면 이쯤에서 허기를 채워야 했다. 동네를 잠시 기웃대다 버스 종점 옆 조그만 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요기를 했다.

불광동 장미공원부터는 길이 제법 험난하다. 탕춘대성 암문 입구까지 2.7㎞에 이르는 옛성길(성너머길)
구간은 바위와 흙길, 계단이 번갈아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다. 빗물을 흠뻑 머금은 진흙길이 너무 미끄러웠다. 그냥 허연 나이론 끈만 길목을 표시하고 있는, 채 정비되지 않은 험한 길에도 당황하기 쉽다.
이정표를 가까스로 더듬어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목을 힘겹게 올라가다 보면 간혹 너럭바위 쉼터들이 있다. 능선 아래 불광동 풍경이 아기자기한 조망을 선사한다. 지대가 높은 만큼 바람은 서늘하다. 능선 하나를 더 오르니 드디어 네모난 돌문같이 생긴 탕춘대성 암문이 보인다.
이북 5도청 방향으로 계속 오르막 내리막 길을 힘들게 걸었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 쉬운 길이어서 지도에 짧게 표시된 거리보다 멀고 높다는 느낌이 든다. 무릎이 아프다. 어디까지 왔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지도를 펴보니 평창마을길(탕춘대성 암문 입구에서 형제봉 입구까지) 5㎞가 표시되어 있다.

고급주택가 관통하는 평창 마을길
얼마나 걸었을까. 길음동에서 왔다는 한 부부와 마주쳐 쉬는 겸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효자동에서 시작해 정릉으로 가는 중이지만, 그들은 정릉에서 출발해 효자동으로 가는 중이다. 그들은 둘레길을 사흘째 걷는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 등산으로 단련된 발 빠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보통사람에게 둘레길은 적어도 사흘 일정은 잡고 걸어야 한다.

평창동 뒷길은 거의 등산로라고 해야 할 만큼 높은 지대인데도 민가가 여기저기 있어 개 짖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첫날 일정부터 평창동이 “터가 세다”라는 말을 몇 번 얻어들었는데, 꼭대기까지 올라와 보니 정말 무언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집터라기보다는 절터에 어울리는 산자락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을 비롯해 한백연구재단, 법정사 같은 사찰들도 산자락과 어우러져 있다. 옛 성곽의 흔적같이 보이는 돌담을
지나가는 평창동 11길에서 기품 있는 소나무 정원수와 대리석과 옥돌로 장식된 호화스러운 주택들을 구경할 수 있다. 부자들이 높고 외진 북한산 자락을 선호하는 이유는 뭘까. 이른바 명당발복(明堂發福)에 대한 소망 때문일까. 좋은 땅에 살면 그 영향으로 모든 일이 잘 풀려간다는 풍수지리의 신념 말이다.

볼거리는 많았지만 이미 지쳤다.

아직 평창동 주택가를 지나 ‘명상길(사색의 길)’이라 불리는 세 개의 능선이 2.4㎞쯤 정릉까지 이어져 있다.

사색의 길로 접어드는 길목을 놓치고 내려가던 중에 산책하던 동네 사람을 만났다.

그는 “북한산 둘레길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 여기”라며 동네 자랑을 늘어놓는다.
취재진임을 밝히자 “사람들로 번잡해질 수 있으니 명상길에 대해 쓰지 않으면 좋겠다”고까지 말한다.
과연 입구에 들어서니 울창한 수목과 바위들이 제각기 자태를 뽐내며 솟아 있다.
돌 틈으로 흘러드는 물소리에 예쁜 징검돌이 네모로 잠겨 있다.
사방이 온통 초록인가 싶더니 어스름이 짙어간다.
날만 밝았다면 진초록 울울함이 더욱 아름다울 숲길을 시간에 쫓겨 걷는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표지판조차 어둠에 물들어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도 된다. 산행꾼들도 보이지 않는다.
바삐 걸음을 재촉하고는 있지만 발목에서 힘이 빠진다.

적어도 하루쯤 더 일정을 잡았다면 시원한 계곡물에 발도 담그며 가뿐하게 즐기며 갈 길인데, 너무나 지쳐 몸보다 마음이 먼저 정릉에 가닿는다. 생각해 보니 오늘만 꼬박 10시간을 걸었다.
걸음은 망가진 피노키오처럼 삐그럭거린다. 거의 울고 싶은 심정으로 동행한 기자에게 묻는다.
왜 나같이 어수룩한 사람을 호출했느냐고.
산전문가도 등산꾼도 아닌, 게다가 한심하도록 길눈도 어두운 나를!

그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 걸어본 둘레길이어야 한단다. 완주하려면 2㎞를 더 걸어야 한단다.
밀쳐놓은 일들만큼 허둥거려야 할 내일도 내일이지만, 둘레길 완주를 했노라고 폼도 잡아보고 싶었지만
굳이 ‘완성’이라는 무지한 목적에 매이지 않기로 한다. 거리와 높이와 속도에 대한 아집을 버리고, 각자의
리듬대로 돌아가는 길이 둘레길이 아닌가. 0 아니면 1인 디지털의 논리쯤은 벗어던져야 한다.
유구한 아날로그 시대의 해시계처럼 결국 가도 가도 본자리로 오게 하는 둘레길이 아닌가.

 

천천히 걸으면 사흘 … 우이령길 곳곳엔 분단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