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끝마치지 못한 일 때문에 서류를 들고 급히 달려가다가 걸음을 멈춘다.
발길을 돌려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불타는 곳으로 가고 싶다.
들국화가 구절초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곳으로 걸어가 거기 누워서 가을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다.
포도잎이 갈색으로 말라붙은 긴 포도밭, 추수가 거의 다 끝나가는 쓸쓸한 논둑길을 걸어 강가로 가고싶다. 날이 저물며 으스스 추워져 저녁 강물이 반짝이는 비늘을 후르르 털고 있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앉아 있고 싶다.
약속한 사람을 만나러 가다 발길 돌려 기차역으로 가고 싶다. 시골 간이역으로 가는 표를 끊어 열차에 몸을 싣고 싶다. 가다보면 목행역이나 삼탄역 근처를 지날 때처럼 차창 밖으로 수려한 산줄기가 지나가고 그 아래 푸른 물이 흐르는 곳에서 내려 늘 열차에 앉아 바라보기만 했던 나무다리나 흙다리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고 싶다. 아는 이 아무도 없는 시골역에서 내려 허름한 선술집에 들고 싶다.
연신 시계를 보며 회의시간에 늦지나 않을까 마음 졸이며 차를 타고 가다 문득 차에서 내려 억새풀이 손짓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 기온이 뚝 떨어져 더 을씨년스러운 날, 길 양쪽으로 낙엽지는 가로수가
길게 뻗어있는 길을 혼자 걷고 싶다. 지치도록 걷다가 길가 허름한 여인숙에서 마룻장 삐꺽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치고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고 싶다.
그런 집에서 아무 생각없이 며칠씩 지내고 싶다.
입사 십 년 만에 초고속으로 승진하여 최연소 지점장이 되었던 서른여섯 살의 유능한 은행원이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 했다는 기사를 읽은 날, "나는 은행을 위해 일한 결과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지만 아빠는 최선을 다했다. 바보같은 아빠의 삶을 살지 말라.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길 바란다." 는 유서를 읽던 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무작정 몸을 싣고 싶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가을 풍경을 따라 발길 가자는 대로, 마음이 가자는 대로 한없이 가고 싶다.
산사의 느티나무 잎이 바람을 따라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나뭇잎을 따라가는 풍경소리를, 풍경소리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구름을, 구름을 안고 우주 저편을 넘어가는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고 싶다.
도종환 님.
월간 '좋은 생각' 에서...
그렇지요?
가을은 도종환님 같은 시인이 아니더라도 어느 누구나 시인이 될 것 같은 그런 감상에 빠지게 합니다.
"바람이 분다, 떠나야 겠다" 라는 어느 책 제목처럼 그냥 무작정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가을은 충동적입니다. 누구에게나 방랑을 꿈꾸게 합니다. 길 나섬을 부추깁니다.
그냥 떠나라...
하지만 그건 마음 뿐...
그게 바로 현실과의 괴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 만이라도 즐거운 여행을 떠날 수 있었음...
풍요로운 가을이 됐으면...
가자고...
1박 2일의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시계를 보았다. 오후에 수기 심사평을 쓰고 저녁에 문상을 다녀오려면 지금 출발해야겠구나,
하고 시간을 계산 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창 밖은 맑고 시원했다. 가을 햇살이 들판을 노릇노릇하게 바꿔가고 있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팔에 와 닿는 바람의 느낌도 좋았다.
들 가운데를 달려 마을을 몇 개 지났더니 길 옆으로 계곡이 나온다. 가을 햇살을 담고 있는 맑은 물이 보인다. 그냥 지나치려다 차를 세우고 계곡 아래 물가로 내려가 계곡물에 손을 담갔다. 차고 서늘하니 참 좋다.
물가에 피어있는 연보랏빛 쑥부쟁이꽃의 옅은 향기를 맡다가 바위위에 길게 누웠다.
나뭇잎을 쓸고 가는 바람 소리가 솨아솨아하고 들릴 때마다 나뭇잎들이 바짝빠짝 몸을 뒤집는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크기에 따라 가끔씩 햇살이 눈 위로 물줄기처럼 쏟아지다가 하늘로 올라가곤 한다.
높푸른 가을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들이 천천히 움직인다.
구름을 오래 바라보는 일은 우리의 상상력을 무한히 넗은 공간으로 끌고 간다.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의 모습 속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이 보이기도 하고 쉬르리얼리즘의
미술이 보이기도 한다. 추상과 반추상의 화폭이 보일때도 있고 고생대의 짐승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다정하게 입맞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사람하는 이의 옆 얼굴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가던 길에 차를 멈추고 바위 위에 누웠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다.
그냥 지나쳐 목적지로 향했으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삼사십 분 늦어지겠구나' 생각하다 '좀 늦어지면 어때' 하고 마음을 바꾸었다.
내 인생에서 사십 분 늦어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아니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는 것이 내 인생에 어떤 변화를 주는 것일까.
가고 있는 길에 아름다운 경치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잠시 함께 있다 가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며
사는 일일까. 도리어 시간을 풍요롭게 바꾸며 사는 일은 아닐까.
돌아오는 길... 다시 샛길을 택해 고개를 넘었다.
거기에는 굽이굽이 꺾어지는 길마다 코스모스들이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다.
나도 코스모스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개를 다 넘을 때 까지, 산 굽이를 돌아 나올 때 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마주 오는 차들은 누구를 보고 손을 흔드는 걸까 의아해 하겠지만 나는 이 꽃들과 가는 길이 마냥 좋았다.
인생의 길에서 한두시간쯤 늦어지면 어떠랴.
이렇게 아름답고 넉넉한 시간 속을 택해서 가고 있는데...
도종환 님..
월간 '좋은 생각' 에서...
역시, 글 쓰는 분이라 보는게 예사롭지 않다.
우리네 같은 사람들이야 '좋구나~' 하고 그냥 무심코 지나 치련만 거기에서 눈에 보이는 듯한 이러한 풍경을 뽑아 내다니...
아! 글 잘 쓰는 분들이... 부럽다.
011030..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