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겨울에 피는 꽃

-gajago- 2010. 2. 7. 15:55

일자리를 잃어버린 후, 재호는 몸과 마음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돌이지난 딸아이에게 먹일 분유값이 없어 애가 탓다. 

친지와 친구들에게 여러차례 도움을 받아 더 이상은 도움을 청할 염치도 없었다.

오늘도 재호는 일자리에 대한 기대를 안고 집을 나섰다.
퀴퀴한 냄새 가득한 골목길에 깨진 연탄재만 을씨년스럽게 날렸고,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써 놓은 담벼락 낙서 위로 겨울 햇살이 한나절 둥지를 틀었다.

무거운 하루를 또 다시 등에 이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고등학교 동창 성훈이 생각 났다.
성훈이라면 자신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성훈이는 오래전부터 가난하게 살아 왔다는 걸 재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친구가 무척 보고 싶었다.

재호는 가파른 목조계단을 올라 성훈이의 화실이 있는 복도를 들어섰다. 

그때 중년의 남자가 흰 종이에 포장된 그림을 들고 계단쪽으로 걸어 나왔다.

화실문을 들어서자 성훈은 재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 겨울에도 화실의 난로는 꺼져 있었다. 두껍게 옷을 입고 있는 성훈이의 얼굴도 까칠해 보였다.

"손님이 왔는데 추워서 어쩌냐?"
"내가 뭐 손님이냐, 춥지도 않은데, 뭐."

재호는 미안해하는 성훈이 때문에 일부러 외투까지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내가 빨리 나가서 라면이라도 사 올께. 잠깐만 기다려?"

성훈이 나간 동안 재호는 화실의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벽에 붙은 그림속에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어둠속을 귀가하는 도시 빈민이 있었다. 
자신을 닮은 그 지친 발걸음을 재호는 한참 동안 바라 보았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재호는 몇 번을 망설였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재호는 옷걸이의 외투를 걸쳐 입었다. 외투의 무게 만큼이나 재호의 마음도 무거웠다.

"나 그만 갈게. 성훈아, 잘 먹고 간다."
"오랫만에 왔는데 라면만 대접해서 어쩌지?"
"아냐, 맛있게 먹었어."

재호는 어둠이 내린 버스 정류장을 서성거렸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어린 딸을 생각하고 아내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러다 무심코 넣은 외투 주머니속에서 만 원짜리 다섯 장과 천 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재호 모르게 성훈이 너어 둔 것이었다.

재호는 빠른 걸음으로 화실을 향해 걸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실의 문을 막 열려는 순간 안에서 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 오후에 그림을 사러 오기로 했던 사람이 오질 않았어. 
수민이 생일 선물로 곰인형하고 크레파스 사간다고 약속했는데, 차비밖에 없으니 큰일이네?"

재호는 차마 화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추운 화실에 앉아 성훈은 굳어진 손에 하얗게 입김을 불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인형과 크레파스 대신 딸에게 줄 그림 속에는 아기공룡 둘리가 분홍빛 혀를 내밀며 웃고 있었다.

성훈은 채 마르지 않은 그림을 손에 들고 화실문을 나섰다.
그런데 바깥 문고리에 비닐 봉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어둠속에서 들여다 본 하얀 봉지 속엔 귀여운 곰인형과 크레파스가 담겨 있었다.

사랑은 소리없이 와 닿을 때 가장 아름답다.     

이철환 님 "연탄길" 중에서...

 

이철환|서울 출생, <씨앗> 동인.
'동아일보''국민일보' 등에 우리 이웃들을 대상으로 한 따뜻한 글을 실었고, 
월간지 '낮은 울타리' 와 '주변인의 길'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은 왜 이리 힘들까요?
허긴... 그러니까 저렇게 서로를 생각해 주는 정이 있는것 같군요.

2001-12-27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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