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소나기 4

-gajago- 2010. 6. 10. 00:28
이 날 밤, 소년은 몰래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으로 갔다. 
 
 낮에 봐 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호두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 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 치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열 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불룩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옻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가는 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어서 소녀에게 맛보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그러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더러 병이 좀 낫거든 이사 가기 전에 한 번 개울가로 나와 달라는 말을 못해 둔 것이었다.
바보같은 것, 바보같은 것.

 추석 전 날, 소년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가 나들이옷을 갈아입고 닭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어디 가시느냐고 물었다.
 그 말에는 대꾸도 없이, 아버지는 안고 있는 닭의 무게를 겨냥해 보면서, 
 
 "이만하면 될까?" 
 
 어머니가 망태기를 내주며, 
 
 "벌써 며칠째 '걀걀' 하고 알 날 자리를 보던데요. 크진 않아도 살은 쪘을 거여요." 
 
 소년이 이번에는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 보았다. 
 
  "저, 서당골 윤 초시 댁에 가신다. 내일이 추석날이라 제삿상에라도 놓으시라고‥‥‥"
  "그럼, 큰 놈으로 하나 가져가지. 저 얼룩수탉으로‥‥‥" 
 
 이 말에 아버지는 허허 웃고 나서, 
 
 "이놈아, 그래도 이게 실속이 있다." 
 
 소년은 공연히 열없어, 책보를 집어던지고는 외양간으로가, 쇠잔등을 한 번 철썩 갈겼다. 쇠파리라도 잡는 듯이.

 개울물은 날로 푸르러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뵈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조그마한 가게를 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는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다. 
 
 날 밤, 소년은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 나. 가면 소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가 하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갔던 아버지가 언제 돌아왔는지, 
 
 "윤초시 댁도 말이 아니야.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버리구,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
지 당하는 걸 보면‥‥‥"
 남폿불 밑에서 바느질감을 안고 있던 어머니가, 
 
 "증손자라곤 계집애 그 애 하나뿐이었지요?"
 "그렇지, 사내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식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 앤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선 윤 초시네도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앤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 달라고‥‥‥" 

 
황순원(1915~2000)은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의 소설은 간결하고 세련된 문체, 소설 미학의 전범을 보여주는 다양한 기법적 장치, 소박하면서도 치열한 휴머니즘의 정신,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에 대한 애정 등을 고루 갖춤으로써 한국 현대 소설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별>,<소나기>,<목넘이 마을의 개>,<나무들 비탈에서다> 등이 있다. 



글쎄요...
이 글을 옮기면서 다시 읽어 보지만...
순수하다는 것... 진한 서글픔같이 느껴지는게
과거, 못 이룬 사랑에 대한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그것도 아니면 철이 덜 들어서인지... 모르겠군요.

에구~
언제 철들지 몰라~ ^ ^

편한 밤 되시길...
 
021011..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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