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님들 잘 아시는 정채봉님의 동화 '오세암'을 올립니다.
너무나 슬... 아 참, 이런 주석은 필요 없겠군요. 이미 다 잘 아실테고 또, 읽어보면 아실 터...
(시리즈로 계속 올립니다. ^^)
1. 바다보다 넓게 내리는 눈
스님은 그 거지 남매와 포구에서 만났다.
수만 마리의 하얀 나비들이 나는 듯 눈발로 가득한 바다를 보고 있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누나, 눈이 바다보다 넓게 내린다."
스님이 돌아보니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장님 소녀의 손목을 잡고 소나무와 나란히 서 있었다.
작은 나무 그릇을 하나씩 든 것으로 보아 얻어먹고 다니는 아이들이 틀림없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스님은 아이 옆으로 다가서면 말을 걸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서 빤히 스님을 쳐다보았다. 가을 아침 물빛처럼 시린 눈총이었다.
"스님 눈썹에도 눈송이가 떨어졌는걸."
스님의 손이 눈 위로 올리자 아이가 다시 말했다.
"콧등에도야."
장님 소녀가 아이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누구니?"
"스님이야. 머리에 머리카락 씨만 뿌려져 있는 사람이야."
"머리카락 씨만 뿌려져 있다고? 고 녀석 참......"
스님의 입가에 초승달 같은 웃음이 물리었다.
"누나, 오늘 하늘이 저 스님이 입은 옷 색깔 하고 같아. 저런 색을 뭐라 하더라?"
"재색이라고 하지."
스님이 대답하였다.
"우리 누나는 그런 말 못 알아 들어. 맞아, 생각났다. 맛없는 국 색깔이야."
장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알겠다. 그러니까 때 지난 나물국 빛이다, 이거지?"
스님은 웃음을 거두고, 사내아이의 나무 그릇에 돈을 놓았다.
스님이 한참 가다가 돌아보니 그들 남매는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바다로부터 물새 우는 소리가 쫓아와서 스님을 한참 동안 꺼억꺼억 하고 따라다녔다.
첫눈이어서 그런지 눈발은 쌓이지 않고 금방금방 녹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체 밖을 내다 보려고 하지 않았다.
스님은 탁발 그릇 속의 눈을 비우고 산 쪽으로 돌아섰다.
주막이 있는 삼거리를 지나 설악 자락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길가의 짚가리 속에서 아이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나, 식은 나물국 스님이 가고 있다."
스님은 짚이는 데가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서 짚더미를 헤쳐 보았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장님 소녀와 그 아이가 노랑 지빠귀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너희들 왜 집에 가지 않고 여기에 있니?"
"우리는 집이 없어."
"그럼 여기서 자겠단 말이냐?"
"응."
"눈이 그치면 눈보라가 칠 텐데......"
"괜찮아. 우리가 싸우지만 않으면 돼. 우리가 사이좋게 있으면 매운 바람도 우릴 비켜 가는걸."
"허허, 녀석들 참......"
스님은 돌아서서 걸었다.
그런데 어린 것들이 눈바람 속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새 울음소리로 나타나서
걸음을 더디게 했다.
스님은 얼음이 서리는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발길을 돌렸다.
짚더미를 헤치고 아이들을 불렀다.
"너희들 날 따라가지 않을래?"
"어디로 가는데요?"
이번에는 장님 소녀가 말대답을 하였다.
"절로 가지. 내가 묵고 있는 절에 가면 따뜻한 방도 있고 밥도 있단다."
"정말이야? 스님!"
사내아이가 벌떡 일어나면서 손뼉을 쳤다.
스님은 아이들의 머리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내면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길손이야. 누나 이름은 감이구."
"길손이와 감이라아...... 거 참, 흔치 않은 이름이구나."
"내 이름은 향교 문지기 아저씨가 지어 주었어. 떠돌이라는 뜻이래.
감이 누나 이름은 내가 지었구."
"감이라는 뜻은 무엇인데?"
"아이, 스님도 답답하다. 감이는 그냥 감이라는 뜻이야. 눈을 감았으까. 그래서 감이야."
"허허, 고 녀석 참......"
"스님, 우리를 데려가도 높은 사람이 눈치 안 해? 향교에서도 그래서 쫓겨났는데......"
"그러면 조카들이라고 해야지. 이제부터 너희들은 부모 잃은 내 조카가 되는 거다."
도란도란 얘기하며 걸어가는 세 사람의 등에서 눈발은 서서히 성글어졌다.
2002-01-17
가자고...
'마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세암3 (0) | 2010.02.12 |
---|---|
오세암2 (0) | 2010.02.12 |
성큼 다가온 미래도시? (0) | 2010.02.12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 (0) | 2010.02.12 |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않는 남자 (0) | 2010.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