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오세암6

-gajago- 2010. 2. 12. 17:56

주말입니다. 겨울가뭄 중에 비 내린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리고...
님들 좋은 일도 많이 있으시길...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스님이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절에 올라간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큰 절에 있는 감이를 데리고 관음암을 향해 다시 오른 것은, 
스님이 길손이를 관음암에 혼자 남겨 두고 떠나온 날로부터 한 달하고 스무 날째가 되던 날이었다.

눈이 녹았다지만 길은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눈 녹은 물이 그대로 얼어붙어서 빙판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용케도 발이 나아가는 것은 길바닥에 드러나 있는 무수한 나무뿌리들 덕이었다. 
줄줄 미끄러지다가도 신발이 나무등걸에 걸리는 통에 몸을 가누게 되었다.

"감이야, 이젠 비탈이 가파르니 내 등에 업혀야겠다."
"괜찮아요, 스님. 조금 더 걷겠어요."

감이는 지팡이를 짚고 다시 일어났다.
오랜만에 나타나는 사람이 신기했던지 노루가 빠끔히 나무 사이로 내다보다가는 사라졌다. 
장끼는 깃을 하나 떨어뜨려 놓고 등 너머로 날아갔다.

"봄이 어우러지는 흙내음이 나요."
감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하였다.

"저 곰골 허리도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구나. 저것도 봄기운이지."
스님이 감이의 팔을 잡아 주면서 말하였다.
봄물이 연하게 오르는 물푸레나무 가지에는 밀화부리새가 앉아서 울고 있었다.

마등령 고개가 시작되는 데서부터였다. 
감이의 귀가 자주 쫑긋거리었다.눈가의 눈썹도 움찔움찔 움직이었다. 

"스님, 냄새가 나요."
"사향노루 내음 말이냐?"
"아냐요. 우리 길손이 내음이어요."
"허허, 고 녀석 참......"

스님은 감이를 업었다. 한참을 걸었다. 갑자기 감이가 스님을 불렀다.

"스님,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으셔요?"
"무슨 소리? 지금 윙윙거리는 저 소리는 전나무를 울리는 바람 소리인데."
"아냐요. 바람 소리말고."
"바람 소리말고? 아, 그거야 새우는 소리 아니냐?"
"새 우는 소리말고,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셔요, 스님?"
스님은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늙은 마가목나무를 쳐다본 스님은 하, 하고 얼굴을 풀었다.

"감이야, 그건 딱다구리라는 새가 고목을 쪼는 소리란다."
"딱다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라구요? 아, 들은 적이 있어요. 언젠가 길손이가 말해 주었어요. 
날개는 까맣고 입부리가 긴 새라고 했어요. 그 새가 묵은 나무 틈새에 사는 벌레를 잡아먹느라고 
따따따 입부리로 쫀다구요."
"그래, 조금 전에 네가 들은 소리가 바로 그 딱다구리 소리란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걸터 앉아서 잠시 쉬었다.

"스님, 우리 길손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스님은 헛기침으로 크음, 눈물을 삼키고 나서 감이를 일으켰다. 

능선길을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암자가 있는 산허리로부터 솔바람이 한 줄기 흘러내려 왔다.

"스님, 딱다구리 소리가 아니어요!"
감이가 펄쩍 주저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스님도 들었다. 바람을 타고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들려 오는 소리... 
그 소리는 목탁을 두들기는 소리였다.

"암자에 떠돌이 스님이라도 와서 묵고 있단 말인가."
스님은 살갗이 활시위처럼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서 가보자."
스님은 서둘러서 감이를 업었다. 잡목숲 속으로 난 작은 길을 숨가쁘게 걸었다.

관음암의 지붕이 보이는 잔솔밭 언덕에서 감이가 잠깐 내리고 싶다고 하였다. 

스님이 땅에 내려주자 감이는 서너 걸음을 더듬거리고 앞으로 나갔다. 
찰피나무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었다.

"왜? 이번에는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
감이는 손짓으로 말하였다. 어서 와 보셔요, 어서요, 하고...

"무슨 일이 있느냐?"
"들어 보셔요. 들리지 않으셔요?"
"고 녀석 참. 나한테는 목탁 소리밖에 안들리는구나."
"가만히 들어 봐요. 저봐요.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하잖아요." 

"저....... 저....... 저....... 소리는......"
스님은 감이의 팔을 잡아 끌고 달렸다.


♣꽃비가 내리다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가가워졌다.
스님은 암자로 들어가기가 바쁘게 무릎을 꿇었다.
막 길손이를 부르려는데 소리 없이 법당문이 열리었다. 
살며시 걸어나오는 발, 그것은 길손이의 빨간 맨발이었다.

"아이, 어떻게 된 일이냐? 길손이 네가 살아 있다니?"
스님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가 오셨어요. 배가 고프다 하면 젖을 주고 나랑 함께 놀아 주었어요."
길손이의 말이 떨어졌을 때였다. 
뒷산 관음봉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소리도 없이 내려오는 것을 스님은 보았다.
여인은 길손이를 가만히 품에 안으며 말하였다.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은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까지도 얘기해 주었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꽃이 피면 꽃아이가 되어 
꽃과 대화를 나누고, 바람이 불면 바람아이가 되어 바람과 숨을 나누었다. 
과연 이 어린아이보다 진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 아이는 이제 부처님이 되었다."
이 순간 우물 속의 흰구름이 빨갛게 변하였다.

그때였다. 감이의 환희에 찬 목소리가 터진 것은.

"스님, 파랑새가 날아가고 있어요!"
댓돌 아래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스님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관세음 보살님이 파랑새로 몸을 바꾸어 날아가고 있구나. 그런데 눈이 먼 감이 네가 
어떻게 보느냐?  아니, 이게 웬일이냐?  감이 너 눈을 떴지 않느냐?"
"네, 스님. 모든 게 보여요. 햇빛도 보이고, 스님도 보여요. 마루 위에 잠이 들어 누워 있던 
길손이도 보여요."
"아아, 부처님."

스님은 길손이한테 계속해서 절을 하였다.
눈을 이제 막 뜬 감이도 스님을 따라서 절을 하였다.
감이는 길손이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누나!" 하고 일어나서 장난을 걸 것 같아서 길손이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길손이는 엄마의 그윽한 품안에 아주 편안히 누운 것 같았다. 
뺨에 손바닥을 괴고 모로 누운 모습이 재미있는 놀이라도 구경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 시간에 설악산에는 꽃비가 내렸다.
솜다리, 금낭화, 금강초롱, 철쭉꽃이 온통 산을 덮었다.
그리고 다람쥐, 오소리, 토끼, 사슴 들이 꽃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관음암을 향하여 달려왔다.


2002-01-24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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