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내 마음의 우물

-gajago- 2010. 4. 26. 20:03

가 자라던 고향 우리 집 울타리 밖에는 이끼가 파랗게 낀 낡고 오랜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다.

신록이 우거지는 이맘때면 나는 가끔 꽃피던 고향의 그 우물이 생각난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그곳에서 물을 길어다 먹고, 밭에서 가져온 채소를 그곳에서 씻어갔다.

나는 특히 따뜻한 계절 한낮의 고요하고 한가로운 우물가를 좋아했다.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도 분주하고 떠들썩하다가도 한낮이면 우물가는 고요 그 자체였다.
찌그러진 양철 두레박 하나가 밝은 햇볕 아래 물기 없이 뒹굴며 나른한 오수를 즐겼고

우물가에 늘어진 버드나뭇가지는 언제나 한들한들 날리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마다 나는 그렇게도 밝고 고요하고 한가로운 텅 빈 우물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우물가엔 두레박이 물기없이 마른 채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허리를 굽혀 우물안을 들여다 보곤했다.

안에는 파란 이끼가 젖어 있었고, 언제나 꼭 그만큼의 물이 고여 있었다.
잘 닦인 거울 같은 수면위로 하늘과 구름과 버드나뭇가지가 거꾸로 들어가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다.
목마른 것도 아니면서 나는 낑낑대며 두레박에 물을 담아 끌어 올려서는 두레박에 머리를 박고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숨이 차도록 물을 마셨다.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곳에 와서 물을 길어다 마셨다.
어스름 저녁이면 가족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나온 동네 아주머니들의 왁자지껄한 이야기와 웃음으로

생명감이 가득하던 우물가였다.
김장철이 되면 우물물은 온종일 퍼 올려져서 곧 바닦이 들어날 것만 같았다.
이럴 때면 어린 내 마음은 조마조마했으나 다음 날 아침이면 우물은 다시 그 만큼의 물로 채워지곤 했다.
물을 덜 쓰는 추운 겨울날에도 우물물은 크게 불어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우물에는 언제나 줄지도 넘치지도 않게 꼭 그 만큼씩의 물이 고여 있었다.

고향을 떠나 20여년이 흐른 후, 그 우물이 폐정(廢井)이 되어버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물이 말라버린 우물은 허연 흙을 들어내고 쓰래기마저 뒹굴고 있더라는 것이다.
집집마다 수도가 놓인 뒤로 물을 길어 쓰지 않게 되자 우물은 점차 줄어들어 언제부턴가 아주 말라버리더라는 것이었다.
고향 마을에 우물이 없어지다니. 나는 고향을 잃은 듯 슬펐다.

그래, 우물은 물을 길어 씀으로써 채워지는 것이었구나. 길어 씀으로써 맑은 물이 샘솟고, 풀어 나눔으로써

더욱 보배롭게 채워질 내 안의 우물을 갖고 싶다.

길어 써도 길어 써도 언제나 맑은 물이 그만큼 채워지던 고향 마을의 추억 속의 우물처럼 살고 싶다. 

-김선아/국문학박사.수필가-
벼룩시장에서...

, 어찌 그리 시골의 우물 모습을 그렇게 절묘하게, 세세하게 표현 했을꼬?
나의 고향의 우물의 모습도, 우물가의 풍경도, 심지어 우물에 허리 깊숙이
숙여 고개를 처박던 기억까지도 똑같다.
우리네 고향의 풍경은, 사람 사는 모습은, 꼬마들의 행위까지도 그렇게 닮은 꼴 인가 보다.

그래서 이러한 글이 글쓴이의 마음에 공감을 느끼며, 잃어버린 우물에 같이 고향을 잃은 듯한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지나보다.
허긴 우리 고향의 우물도 이미 그러한 처지가 되었음인데 무슨 말을 더하랴.

020513..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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