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숙녀(서정이방)

6. 情 떼기...(채 박사님 글...계속...)

-gajago- 2009. 7. 6. 21:04

6. 情 떼기...(채 박사님 글...계속...)


원주에서 수술을 끝내고 서울로 와서 1970년부터 청십자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의료보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때 였으니까,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설득하기 위해 매우 바쁘게 돌아 다녔다.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걸음도 잘 못 걸었기 때문에
아내는 그야말로 나의 지팡이, 나의 눈이었다. 흉한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가리기 위해서
검은 선그라스를 끼고 다녔다. 나 때문에 놀라 도망가는 심장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또 일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미남이 되는게 유리하다 생각해서 연세의료원 성형외과 유박사를
찾아갔다. 유 박사는 아직 얼굴 수술을 더 많이 해야 하겠는데 성한 피부를 뗄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부를 떼 줄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대뜸 "제 피부를 떼면 안 될까요?" 하고
대답했다. 이럴 정도로 아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살아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충동이 생겨났다.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서울 청십자도 어느 정도 조직이 되었고 생활도 안정되어 갔다.
그런데 참 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인지, 우리 가정에 다시 사고가 생기고 말았다.

아내는 결혼 초에 나와 함께 풀무학원에서 근 5년 동안 꽁보리밥을 먹으며 고생했다.
그리고 내가 외국에 나가 있는 2년 동안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귀국해서 자동차 사고로 거의 2년 간 나를 간호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몸을 돌 볼 겨를이 없었다. 아내는 처녀시절에 폐결핵을 앓았는데 재발하고
말았다. 나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외엔 아무 생각도 할 여유가 없었던가 보다.
 
70년 5월 24일 화창한 일요일이었다. 처제와 함께 부산에 있는 아이들 생일 선물을 사려고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 돌아오려 백화점을 나서는 순간 아내가 갑자기 각혈을 했다.
처제가 택시로 병원 응급실에 입원을 시켜 놓고 집으로 달려 왔다.
황급히 병원 응급실로 쫓아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그곳 간호사가 무표정하게 "지하실에 내려 갔어요" 라고 알려주었다.
참으로 천진하게도 나는 지하실에도 병실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하실은 병실이 아니라 영안실이었다.

아내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어두컴컴한 영안실에 가서 잠자는 것처럼 평안히 누워 있는 아내의 손을 잡아 보았다.

차디찼다. 참 이상했다. 그 순간 다시 쳐다보기가 싫었다. 그렇게 정이 떨어질 수가  없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부터 정은 끊어지는 모양이다
.
 
'사랑하고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은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돌아가는 동안만이로구나,
뜨거운 피가 멈추는 순간부터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로구나,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괴롭고 슬프고 짜증나도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은 없구나,
역시 인간은 아무리 불행하다 해도 살아 있다는 것 자체 이상 감사를 드릴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금촌에 있는 기독공원묘지에 아내를 묻었다.
아내의 관이 흙속에 들어갈 때 까지도 아내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았다.

모든 절차를(장례, 청십자 이사회...) 마치고 날이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문을 열고 늘 반겨주던 사람이 없었다. 방에서 나오는 찬 공기,
그때 느껴지는 허무감과 절망은 울어도 통곡해도 해결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