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기장

응시

-gajago- 2009. 11. 24. 20:11

지금 올리는 이 글은 내 창작이 아닌 어느 대학생의 掌篇소설이다. 

음~ 그러니까 70년대 후반(78년?)쯤 대학생 33인의 글 모음(꽁트) 집 '어느 科대표의 모노드라마' 란 
책이 있었는데, 거기에 실린 글 중 한편이라는 야그다.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글들이 참 많은...
(본 메거진 65호 '스프링 쿨러'와 같은 책에 있는 글...)

그럼 한 번 진도 나가보자.



[凝 視 ]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숨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中略-

땡볕이 내려쬐고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사뭇 시끄럽기까지 하던 여름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서양제 기성복인 바캉스를 입고 바다로 산으로 달아나던 바로 그런 때였다. 나의 서글픈 

하얀 조가비의 사연은 시골의 꼬마들이 알몸으로 시퍼런 순수에 투신자살을 연습하던 그런때였다. 

하기 수양회 준비차 현지를 답사하러 가던 길이었다. 

수많은 피서객들로 수라장이 된 청량리역을 통과한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이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레스링을 마친 선수처럼 역을 빠져 나와 플랫포옴에 섰다. 
기차는 일찍 오를 수 있었다. 
찌는 더위와 베에토벤의 운명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콩나물의 부조화...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완전한 만원이었다. 

그때 나는 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수많은 인파와 부조화속에서 내가 보아야 할, 그리고 내 눈이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하나의 조화를! 

그녀는 예쁜 하나의 목련처럼, 관이 향기로운 사슴처럼, 호수의 백조처럼 하나의 조화로서 앉아 있었다. 

손에는 책을 펴들고 그 북새통에서도 책을 보려는 의지가 완연했다. 

 

나는 언젠가 친구에게서 들었던『맘에 있는 사람을 사귀는 첫째 비결은 그 사람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다』라는 교훈을 여지없이 실천했다. 

 

멀리서 자기를 응시하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행동은 금새 흐트러지고 말았다. 
우리의 네개의 눈알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섬광(Spark)이 번쩍거렸는지! 
나는 우리의 이 Spark가 단순히 Spark로만 사라질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수많은 인파를 뚫고 그녀 가까이 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가까와진 나를 보고 그녀의 행동은 더욱 헝클어졌다. 영어책을 읽더니 집어넣고 소설책을 읽고 있다.
제 정신이 아닌 나의 시선에 그녀는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차마 앞에 설 수는 없었다. 
두 세사람의 어깨 너머로 그녀의 갈색의 고운 머리칼과 밝은 눈동자와 복사꽃이 피어있는 볼을 훔쳐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늘씬한 다리는 천년을 파닥거리던 백학임을 느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의 눈에 반한 것 같이, 페트카르카가 애인의 손의 아름다움 에 반한 것 같이 나는 그녀의 온 몸의 아름다운 조화에 홀딱 반해 있었다.

2단계의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이대로 계속된다면 바라봄과 되바라봄의 연속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나는 오란씨 세 병을 살 수 있었다. 
하나는 학생들(일행)을 주고, 한 병씩 양손에 들었다. 하나를 그녀에게 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의 주시와, 그녀와 그녀 옆에 앉은 사내녀석의 응시에 의해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응시! 그것은 수많은 언어이며, 열띤 웅변이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먹지도 못하고 두손에 하나씩 들고 한 정거장을 그대로 지났다.
그 때의 어색함과 화끈거림이란... 

살인적인 더위와 수많은 사람들의 무서운 응시를 뚫고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용기는 사랑의 神 큐피트가 

화살로 선물한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하나를 그녀의 무릎에 놓고 사정없이 기차에서 뛰어 내렸다.
수많은 시선으로 뒤통수가 화끈거림을 느끼면서...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달리는 기차에 재빨리 뛰어 올랐다. 난간에 매달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산은 풍성한 신록으로 웅장한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강은 조용한 하프로 갸냘픈 가곡을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갔다. 목적지에 가까이 왔다. 그녀는 내릴 기색도 없다. 
그제서야 나의 단 하나의 소유인 시집을 그녀에게 주어야 한다는 지혜가 떠올랐다. 
덜컹거리는 차속에서 글과 주소를 다 쓰고나니 목적지에 기차가 멈췄다.
나의 단 하나의 소유이며 사랑의 표시인 시집을 건네야 한다는 생각은 모든 사람들의 응시, 
그리고 그녀와 미운 그 사내녀석의 응시에 의해 또 한번 산산이 부서지고야 말았다. 
빤히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에 머뭇거리다가 나는 시집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엉거주춤하며 시집을 주웠다. 

제 3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최후의 갸날픈 용기로써 옆에 앉은 여고생에게 창문으로 시집을 전할 수 있었다.
『이것 좀, 저 아가씨에게...』

목적지에 내려서도 온통 그 생각이었다. 학생들이 『종전에 그 시집 어디에 두었어요?』하고 묻는다.
『응, 여기있어』텅 빈 주머니를 툭툭 쳤다. 

-中略-

결과는 어찌 됐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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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You의 용기에 칭찬하고 싶어요. 서로가 알지 못하는 시점에서 글을 올린다는 것은 제 생애에
처음이에요. 57.9.21일 생이며, 이름은 유재희에요. 현재 간호학을 전공 하지요.』

-下略-

 

 

김 홍 섭 〈作者의 요청으로 학교는 밝히지 않음〉




내용이 너무 길어 중간중간 생략... 

 

2001-08-31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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